본문 바로가기
역사

“우리는 조선 사람입니다” – 3·1운동, 그날의 외침

by sweetdreams200 2025. 5. 28.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 中


1919년 3월 1일, 거리에서 터져 나온 외침

1919년 3월 1일 정오, 서울 탑골공원.
33인의 민족대표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젊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그날의 외침은 서울뿐 아니라, 평양, 대구, 원산, 제주까지 전국으로 번져갔습니다.

3·1운동은 단순한 시위가 아니었습니다.
이는 나라를 빼앗긴 백성들의 정의로운 저항이자,
스스로 독립국임을 선언한 최초의 국민운동이었습니다.


 왜 3·1운동은 일어났을까?

3·1운동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 배경에는 한일병합(1910) 이후 9년간 누적된 민족 억압과 차별,
그리고 국제정세의 변화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일제의 식민지 통치

  • 1910년, 조선은 일본에 의해 강제 병합되었습니다.
  • 한글 사용 금지, 조선인 차별, 토지 수탈, 종교 탄압이 이어졌습니다.
  • ‘무단통치’라는 이름 아래 조선인은 총검 앞에 숨을 죽여야 했습니다.

세계 정세의 변화

  •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 윌슨 대통령은 “민족 자결주의”를 주장했습니다.
  • 전 세계 식민지 국가들이 자주독립을 외치기 시작했고, 조선 민중들도 희망을 품었습니다.

 고종 황제의 죽음

  • 1919년 1월, 고종 황제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일본이 독살했다”는 의혹이 퍼졌고, 민심은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겹쳐진 시점에, 조선인들은 ‘우리가 스스로 독립을 외치자’는 결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전국으로 번져간 만세운동

3·1운동은 서울에서 시작되었지만, 곧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 약 2개월 동안 2,000회 이상의 시위가 발생했습니다.
  • 참여자 수는 약 200만 명, 당시는 조선 인구의 약 10%에 달했습니다.
  • 시위는 학생, 상인, 농민, 여성 등 계층을 가리지 않고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유관순 열사는 17세의 나이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순국했습니다.
그녀의 외침은 지금까지도 기억되고 있습니다.


 잔혹했던 탄압, 꺾이지 않은 의지

일제는 3·1운동에 대해 무차별적인 폭력 진압으로 대응했습니다.

  • 사망자 약 7,500명
  • 부상자 약 16,000명
  • 체포자 약 46,000명
  • 학살, 방화, 고문 등 인권 유린이 곳곳에서 자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민중의 비폭력 평화 시위는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미국 <뉴욕타임즈>, <워싱턴포스트> 등에서도
“조선 민족은 평화적이고 문명적인 방식으로 독립을 외쳤다”고 보도했습니다.


 

 

 

 

 

 3·1운동이 남긴 것들

1.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

3·1운동의 여파로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됩니다.
이는 훗날 대한민국 헌법의 뿌리로 이어지게 됩니다.

 

2. 무단통치 → 문화통치 전환

일본은 3·1운동 이후 국제 여론을 의식해
정치·경제·언론의 부분적 자유를 허용하는 **‘문화통치’**로 전환합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식민지 통치는 계속되었고, 이는 이후 항일운동의 불씨가 됩니다.

 

3. 민족의식의 확산

3·1운동은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라는 자각을 전 민중에게 심어주었습니다.
이는 이후 의열단, 광복군, 국내외 독립운동의 근간이 되었고,
한국 독립의 흐름을 끊임없이 이어나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3·1운동은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이는 지금 우리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든 기틀입니다.
무력도, 무정부도 아닌
한 장의 선언서와 한 줄의 외침으로 시작된 역사적인 날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권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잠시 돌아보는 건 어떨까요?

반응형